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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열번째 책 : <대리사회> 

 

작가: 김민섭
발행일: 2016. 11. 28.

출판사: 와이즈베리 (미래N의 성인단행본 브랜드)

독서기간: 2017. 2. 13. ~ 14.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마시듯이 하루만에 다 읽고는 바로 집어든 김민섭 작가의 후속작 <대리사회>

이럴때면 아빠가 책덕후라서 집에 책이 많다는 사실이 참 감사하다.

아마 도서관까지 가야한다면 게으른 나는 '다음에...' 하다가 안읽게 되었을 테니까.

 

 

두권째 읽으면서 느낀 것은, 확실히 김민섭 작가의 글은 잘 읽힌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에 사유를 잘 녹여낸 잘 읽히는 글이다. 잘 읽히는 만큼 쓰기는 더 어려우셨으리라 상상해본다. 그리고 역시 두권째 읽다보니 자주 반복되는 사유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만큼 반복해 읽으며 나도 되새길 수 있었으니 나쁘진 않았다. (나도 내게 인상깊었던 경험들은 술자리 마다 되뇌이니 작가의 입장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김민섭 작가의 글은 진솔하다. 마냥 착한 척하지도, 마냥 꼰대질하지도 않는다. 자기 마음속의 모순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생각보다 진솔함이란 어렵다. 특히 이렇게 대중을 향해 열어보이는 글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발가벗겨진 채 신촌 대로변에 서있는 기분? 그리고 나이가 들 수록 진솔함과 점점 멀어지기 쉽다. 그런 점에서 김민섭 작가의 글은 나의 아주 친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인상적인 구절을 한 줄, 두 줄 그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매우 많아졌다. 너무 많지 않은가 싶다가도 내 블로그에 내가 글쓰는데 분량이 뭔상관이랴 싶어서 다 타이핑을 했다.

 

 

34~36

"나는 조금씩 주체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 상대방이 말하는 대로 수용하고 긍정하는 간편한 대화의 방식, 말하자면 '순응'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몸에 각인된 것이다.

  (중략) 예컨대 의사 결정권자는 언제나 자유롭게 회의 안건을 내고 소통하자고 하지만 그 누구도 화답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상상과 수용 가능한 범위가 제한되어 있음을 모두가 안다. 거기에서 벗어나거나 반론을 내기라도 하면 곧 눈총이 쏟아진다. 소통은 주체가 된 이들의 논리를 확인하고 강요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다. 부하직원은 직장 상사에게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학생은 교사의 의도에서 벗어난 답을 제출하지 않는다. 아이 역시 부모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털어놓지 않는다.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부터 시작해 교사,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을의 공간'에서 순응하는 방법을 주로 배워왔다.

  -> 우리 단체가 민주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부장 윗급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중략) 그것은 사회가 개인에게 보내는 욕망과 그대로 일치한다. 특히 국가는 순응하는 몸을 가진 국민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 어떤 비합리와 비상식과 마주하더라도 그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국민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중략) 국가 시스템에 효율적으로 통제되면서도 자신을 주체로 믿는, 동시에 사유하지 않고 모든 현상을 바라보는 국민은 지금의 국민국가가 지향하는 '대리사회'의 이상향이다. 그렇게 '대리국민'이 된 이들은 국가를 위한 싸움에 스스로 나선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국가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 그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과 몸소 싸워나간다.

  (중략) 하지만 그것이 대리된 욕망임은 알지 못하고 주체로서 정의로운 행위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37~38쪽

"그 공간의 한 주체로서 존중한다는 의미다. 그 자체로 나는 '함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중략) 같은 공간에 있는 어느 한 존재를 의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한히 아름답고 감사한 일이다."

 

52~54쪽

"호칭에는 듣는 대상의 자존감이나 주체성을 갉아먹는 힘이 있었다. 모든 관계는 호칭에서부터 그 범위가 상상되고, 확장 또는 축소된다. 호칭을 결정할 자유를 빼앗겼을 때부터 나의 신체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니었다.

  ->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함부로 호칭하는 사람들이 매우 무례하고 싫다. 어리다고 쉽게 말놓는 사람도 싫다.

  (중략)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버린다. 나 역시 내가 속한 공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나는 그 구성원이라는 환상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그 환각에 익숙해질 때, 우리 모두는 '대리'가 된다. 그 공간에서는 더 이상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의 욕망을 대리하며 '가짜 주인'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중략) 스스로 물러서서 나를 둘러싼 구조와 마주하지 못하고 호칭이 주는 환각에 취해 살아왔다. 오히려 아저씨가 된 지금, 더욱 주체적인 '나'로서 타인과 마주할 수 있다."

 

65~69쪽

"말이 검열되고 통제되는 것처럼, 차 안에서의 모든 행위 역시 그렇게 된다. 그 무엇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손님이 있는 데까지 도착하고 나면 에어컨 바람이 간절해지지만, 차 안의 온도를 조절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다. 가만히 앉아 땀을 흘리면서, 차의 주인이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이 고작이다. 에어컨뿐 아니라 라디오를 켜고 끄는 것도, 창문을 올리고 내리는 것도, 모두 차의 주인이 판단한다. 사이드미러나 백미러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도 그럭저럭 운행할 수 있으면 웬만해서는 그대로 두고, 의자도 많이 불편하지 않으면 기울기를 조절하기보다는 몸을 빠르게 적응시키는 편을 택한다. (중략) 내가 뭐라고 감히 창문을 열겠어?

  (중략)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환대받을 수 없고 누군가를 환대할 수 없는 존재다.

  (중략) 그러고 보면 누구에게나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주체로서 존재해야 할 소중한 공간이 있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어린 시절에 친구의 집에 놀러갈 때면 냉장고 문을 함부로 열지 말 것을, 그리고 그 부모님이 주무시는 안방의 침대에는 절대 올라가지 말 것을, 몇 번이고 주지시키곤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재봉틀과 아버지의 서재 주변에는 웬만해서는 어린 나와 동생이 오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 역시 자신의 공간에서 주인이 되고 싶어 했고, 그에 따라 타인의 공간을 존중해 주었던 것이다."

 

77쪽

"대리사회의 괴물은 개인에게 주체로서 자신을 정비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의 눈으로 공간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패배'로 규정한다."

 

93~96쪽 : 읽으면서 너무나 화가 난 에피소드

"한번은 새벽에 젊은 커플을 태우고 막 출발하는데 그들에게 계속 전화가 왔다. 받지 않기에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근처 사거리에서 중년의 대리기사 한 명이 전화를 하며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코너를 돌면서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어야 했다. 분노도, 절망도, 허무함도, 그 무엇도 아니면서 더욱 아픈 어떤 감정이 그 찰나의 순간에 그대로 전해졌다. 한 집안의 가장임이 분명할 그는 차의 백미러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전화가 몇 번이고 다시 왔다. 나는 차를 세우고 차의 주인에게 욕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먼저 와서 다행이잖아, 하는 감정이 조금씩 밀고 올라왔다. 나도 아내와 아이가, 내가 돈을 벌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차의 주인도, 운전을 하고 있는 나도, 동시에 혐오스러워서 나는 묵묵히 운전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그들에게 따로 인사를 하지 않고, 말없이 내렸다.

  (중략) 대리라는 직함을 다록 있다고 해서 감정까지 대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03~105쪽 : 페미니즘이란 별것 아니다. 아마 작가는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절대 생각 안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글에서 많은 여성학적 시선들이 느꼈다. 아래와 같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감정이입에서 특히 그랬다.

나는 아내와 아이를 위한 대리인생을 살아가는 동시에, 또 그들의 삶을 대리로 격하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가족 중 그 누구도 주체로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가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중략) 나는 아직 모든 가족을 주체로 두는 방법을 잘 모른다. 하지만 아내하고든 아이하고든, 조금은 더 많이 대화하려고 한다. 기꺼이 그들을 위한 대리의 삶을 살며, 그렇게 조금은 더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

 

136~137쪽

"한동안 그렇게 (육아에 대한) '구걸'을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끊임없이 나를 대신할 '대리인간'을 찾아다녔다. (중략) 학자를 꿈구는 한 인간을 위해서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가, 아내가, 남편이, 그리고 자식들이 동원된다. (중략) 그러한 고난을 추억으로 강요하는 것은 너무나 염치없는 폭력이다."

 

173쪽

"인턴이라는 정체불명의 직함을 부여하고서는 무임금으로 사람을 부리고, 언제든지 해고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조차 보장하지 않아도, 기업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에 더해 국가/정부는 기업을 위한 법안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간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 현장의 주체가 아닌 대리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다. (중략)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181~183쪽

"자본을 가진 갑과 갑의 전쟁에서 피해자가 된 것은 결국 노동의 주체인 '을'이었다. (중략) 내 주변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그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 역시,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행위인 것이다. 분노는 주변의 을이 아닌 저 너머의 갑을 향해야 하고, 공고하게 구축된 시스템에 닿아야 한다."

 

185쪽

"우리는 갑의 자리에서 별 생각 없이 툭툭 말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헛기침이나 하품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말조심'은 을이 아니라 오히려 갑이 더 해야 하는 것이었다."

 

195쪽

"가족적 우애가 노동에 대입되는 것은 전근대적인 폭력이 되기 쉽다. 그 과정에서 많은 비상식이 상식으로, 비합리가 합리로 탈바꿈하게 된다. (중략) 아마도 근로조교 아르바이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남성일 그 '복학생'은 명절 선물을 주는 행위를 통해 교직원들에게 근로조교 아르바이트 집단의, 혹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중략)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조직을/사용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236쪽

"나는 대리운전 기사다. 지문 잠금이라니, 그렇게 생체 정보를 입력하고 화면을 잠가두어야 할 만한 여유는 나에게 없다. (중략) 핸드폰은 나와 연결된 하나의 생체, 외부의 장기와도 같은 존재다. 그러지 않으면 거리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중략) 지문이 없어진 그들의 신체는 이미 기계화되었다. 막차가 끊긴 시간부터 첫차가 움직이기 전까지 '기계들의 밤'이 열린다.

  그렇게 기계가 된 이들을 다시 사람으로 호출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기사와 손님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거기에는 사람만이 존재한다."

 

241~245쪽

"사실 노동의 본질은 '대리'다. 우리는 스스로 하기 어렵거나 귀찮은 일을 타인에게 대가를 주고 대신하게 한다. 하지만 과정의 수고로움은 잘 드러나지 않고 결과만이 남는다는 점에서 노동 그 자체는 대개 은폐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노동하는 모두는 누군가에게는 요정이다.

  (중략) 사람의 노동이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가 노동자를 '요정'으로 상상하게 된 것은 기계 때문이다. 우리에게 선사한 편안함과는 별개로 기계는 사람의 노동을 은폐시키고 그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 게다가 우리가 느끼는 편안함만큼 기계의 발전에 맞춰 노동환경이 개선되는 것도 아니다. 특히 기계를 위한 매뉴얼은 있어도 사람을 위한 매뉴얼은 없다. 기계만큼이나 복잡하고 치밀한 법과 제도만이 노동자를 옭아맨다. 합리와 효율이라는 허상은 쉽게 보이고, 그 너머의 사람이 어떠한 처지에 놓이는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중략) 도시는 언제나 그 공간이 품은 사람만큼의 폐기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쓰레기와 배설물은 하루가 지나면 어디론가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지고, 우리는 거기에 익숙하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시공간으로 밀려난 노동이 있다. 우리는 쓰레기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이 사라지는 과정 역시 보고싶어 하지 않는다. 어느 대학/회사에서는 청소 노동자가 일반 복도를 걸어 다니지 못한다. 그들을 위한 쉼터도 마련되지 않아서 화장실 청소도구실에 숨어서 밥을 먹는다.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우리를 위한 요정이 있다. 그들을 노동자가 아닌 요정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신체를 지워버리는 것은 결국 우리다.

  (중략) 어느덧 우리의 신체는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투명해졌다. 모두가 대리인간이 되어간다. 은폐된 노동을 기억하고 상상하는 일은, 결국 점점 지워져 가는 우리의 신체를 되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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